신팔균 선생은 충북 진천 사람으로 1882년 5월 1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1900년 대한제국의 육군 무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하여 군사교육훈련을 받은 후 1903년 9월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시위연대 제3대대에서 복무했다.
지난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이름뿐인 군대와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보고 참지 못하여 부하 장병들을 이끌고 일제에 대항코자 하였으나 불가항력임을 깨달아 군복을 벗어버렸다.
그 후 향리인 충북 진천으로 내려가 청소년의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항일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사립 보명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고 각 지방의 의병부대 및 전국 각지의 애국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약 2년간 민족교육사업을 전개하며 구국투쟁을 준비한 선생은 1909년 전국의 애국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되었다. 나라의 패망(敗亡)을 지켜본 선생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오직 한가지임을 깨닫고 민족의 남은 여력을 모두 결집시켜 무력(武力)을 키운 다음 일제를 일시에 구축(驅逐)하기로 했다.
선생은 그와 같은 힘을 키우고 결속을 지키는 일이 국내에서는 어렵다고 판단, 만주로 망명하고, 독립군단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1918년경부터 동군단 무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관에 임명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진력하였다.
선생은 이후 일본 경찰서와 주재소를 격파하는 등 선생의 뛰어난 통솔력과 희생정신을 십분 발휘함으로써 국내진입작전을 활발히 실시하였으나 일제의 앞잡이 단체들을 소탕하다, 일제가 사주한 마적들과 교전 중 적탄에 맞아 쓰러졌고 향년 42세로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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