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강화(현 인천광역시) 출생(1897년)의 권애라 선생은 1918년 서울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로 재직했다.
ㅇ 1919년 3월 1일 선생은 예배당에 숨겨두었던 독립선언서를 직접 꺼내 와 심영식, 신관빈 선생 등과 함께 개성 시내에 배포하고, 3월 2일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다음 날인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거리시위에 나서며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ㅇ 이 시위로 선생은 독립선언서 배포 혐의로 체포되어, 1919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경성복심법원에 상고했으나, 1919년 7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ㅇ 선생은 1920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 조직원으로 독립자금 모집에 관여한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해 가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애국부인회와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서 활동했고, 1922년 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상해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ㅇ 1940년 항일 독립운동 참여를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고, 아들 김봉년과 함께 지린성 영신농장을 거점으로 독립군 병력 충원을 위해 활동 중 1943년 3월 일본 관동군에 체포되어 만주국 고등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장춘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 1887년 개성 출생의 심영식 선생은 열병을 앓은 뒤 시력을 잃어 시각 장애를 갖게 되었다. 호수돈여학교를 거쳐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19년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했다.
ㅇ 1919년 3월 1일 권애라, 신관빈 선생 등과 함께 개성 시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3월 4일 개성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투옥 중 간수에게 뺨을 맞고 고막이 터져 평생 한쪽 귀에서 고름이 나오는 후유증으로 고생)를 치렀다.
ㅇ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개성 미리흠여학교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6개월 만에 출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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