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몽규·안창남·김필순 선생은 전문 지식을 개인 부귀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송몽규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하여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실력 양성에 매진했다. 일본 유학을 통해 뛰어난 비행가로 거듭났던 안창남 선생은 자신이 받아들인 새로운 비행기술을 가지고 누릴 수 있었던 부귀영화를 버리고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다. 김필순 지사는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한 뛰어난 의사로서 보장된 출세를 버리고 중국에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 송몽규 선생(宋夢奎, 1917~1945)은 1917년 중국 용정 명동촌의 윤동주 집에서 태어났다. 사촌 동생인 윤동주와는 삶과 죽음을 같이한 특별한 사이였다. 기독교 민족학교로 널리 알려진 명동학교와 은진중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중국 남경의 학생훈련소에 입소하였다. 학생훈련소는 김구 선생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시킬 청년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다. 학생훈련소는 일제의 압력과 독립운동 진영의 내부 혼란으로 학생들의 군관학교 입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1935년 10월 해산되었다. 선생은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와 함께 문학으로 민족 계몽운동을 펼치기 위해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연희전문에서 윤동주 등과 함께 민족문화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연희전문 문과 학생들의 자치단체인 문우회 기관지 ????문우????의 편집을 맡아, 일제의 조선어 사용금지 및 일본어 상용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글 시(詩)를 수록하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세계의 역사 및 문학을 연구하는 동시에 민족문화의 유지에 힘쓰기 위해 사학과를 선택한 것이었다. 선생은 교토에서 윤동주 등과 함께 민족의식 함양을 위해 노력했다. 일제 특별고등경찰은 1943년 7월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 사건’의 주동인물로 선생과 함께 윤동주를 체포했다. 선생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3월 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안창남 선생(安昌男, 1901-1930)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비행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오사카의 자동차 학교와 도쿄의 비행기제작소를 거쳐 1920년 8월 오구리(小栗)비행학교에 입학했다. 선생은 1921년 3월 비행학교를 졸업, 그해 8월 조선인 최초로 3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다. 면허를 취득한 후 귀국한 선생은 고국방문 비행 계획과 비행학교 설립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1922년 6월에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은 선생은 금강호(金剛號)로 명명된 비행기에 탑승하여, 1922년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고국 방문 비행에 나섰다. 선생은 관동 대지진을 겪으면서 식민지 조선인의 울분과 역할을 분명히 자각하게 되었다. 비행기를 이용한 항공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임시정부와 연결되었고, 여운형의 소개로 중국 군벌의 대일항전에 합류했다. 국민혁명군의 반제국주의 이념에 동조하며 반일(反日)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26년 선생은 여운형의 도움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고 있던 산서성 군벌 염석산 군(軍)의 항공사령관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선생의 지위와 자금력으로 신덕영 등과 함께 1928년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을 조직하기도 했다. 대한독립공명단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인 군대를 양성하여 국내 진공(進攻)작전을 구상했다. 선생은 600여 원의 자금을 지원해 최양옥 등을 국내에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자 했으며, 중국에서 조선인 비행사들이 항공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1930년 4월 2일 산서항공학교에서 비행훈련 중에 기체 고장으로 추락하여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고국방문 비행은 식민지 청년들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고조와 조선 사람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1923년 6월 민간 비행가 경쟁대회에서 입상하였고 7월에는 1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하였으나, 9월에 관동(關東) 대지진을 겪게 되었다.
□ 김필순 선생(金弼淳, 1878-1919)은 1878년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1886년 언더우드를 만나서 기독교를 접한 이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고, 한학(漢學)과 영어 실력이 뛰어났던 선생은 1899년 제중원에 들어가 교재로 사용되는 서양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등 에비슨(1952, 독립장)의 통역 및 조수로 활동했다. 선생은 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의술개업인허장(醫術開業認許狀)을 받았으며, 모교와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앞장섰다. 특히 선생은 1907년 2월 귀국한 도산 안창호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의 활동을 지원했으며, 1908년 4월 안창호가 양기탁 등과 함께 설립한 신민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조작했던‘105인 사건’에 연루된 선생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1911년 12월 중국 만주로 망명했으며, 조선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중국 통화현에 정착하였다. 선생은 통화현에서 근대적 시설을 갖춘 병원을 개원하여 독립운동가들과 이주한 조선인들의 치료에 앞장섰다. 이후 1916년 8월 일제의 감시와 간섭이 날로 심해지자 통화현을 떠나 내몽고 치치하얼로 이주했으며, 치치하얼에서 북제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활동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던 선생은 1919년 8월 갑작스럽게 순국했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김규식(1989, 대한민국장)의 처남이자 김순애(1977, 독립장)의 오빠이며, 국내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1962, 독립장)의 삼촌으로서 독립운동 명문가의 일원이었다. 정부에서는 김필순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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