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의 독립운동가 안현경, 이원순 선생
최슬기 | 기사입력 2023-01-02 17:10:17

[충북타임뉴스=최슬기]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현경·이원순 선생을 하와이 이민 도착 120주년을 맞아 2023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하와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을 이끈 두명의 지도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총회를 이끈 안현경 선생은 188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05년 하와이 노동이민에 응모하여 같은 해 5월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1909년 4월 오아후(Oahu) 섬의 와히아와(Wahiawa)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와히아와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10년 7월에는 하와이 각 지방 대표들과 함께 일왕(日王)에게 일본의 한국 강점에 항의하는 전보문을 발송하였다.

1913년 2월 이승만(李承晩)이 하와이에 정착한 후 출판 및 종교·교육 사업을 펼치자, 이승만을 도와 1913년 9월 월간 국문잡지인 『태평양잡지』, 1914년 4월 『한인교회보』 발행과 1916년 11월 하와이정부에 등록된 한인여학원 이사 및 1918년 12월 자치교회인 한인기독교회 선교부 이사원(재무) 등을 맡아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같은 해 7월 원동(遠東) 시찰 겸 통신원으로 임명되었고, 1919년 11월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및 각 부 총장 취임식에 참석했으며, 1920년 미주지역 대표 자격으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여 상임위원회 군무위원(軍務委員) 및 정무조사특별위원회(政務調査特別委員會) 외교분과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2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의 총무로 선임되고, 미주신문 『국민보』의 주필도 맡았다. 교민단은 하와이 국민회가 임시정부의 내무부령 제4호 「임시교민단제」에 의거하여 개편된 단체로써, 같은 해 10월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상업대회에 ‘조선대표’로 김윤수(金潤秀) 등과 함께 일본을 배척하는 연설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1923년 12월 교민들의 금주·금연을 장려하고자 한인교풍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지역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자 이원순 선생과 동지회 중앙부 대표로 참석했고, 그 결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주미외교위원부가 출범하게 됨으로써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전개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교민들로부터 더 많은 독립지원금을 모금하기 위해‘재무부’조직을 확대했고, 선생은 다섯 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57년 하와이에서 사망하였고, 『국민보』는 선생의 별세 소식을 알리면서 “동지회 창설자 중 한 분이요, 한인 기독교 영도 중 한 분이라더라"고 추모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해는 국내로 1998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재미한족연합회의 한 축을 이끈 이원순 선생은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4년 보성(普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주 하와이로 망명했고, 하와이에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에 가입하였다. 대조선독립단은 1919년 박용만(朴容萬)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한인 350여 명을 규합하여 만든 항일독립운동단체로써,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출판, 외교사업과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이승만 중심의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에 가입하여, 외교활동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힘썼고, 동지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던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의 주필을 맡아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했다.

*『태평양주보(太平洋週報)』의 영문명은 『The Korea Pacific Weekly』로, 1913년 9월 이승만이 발간한 『태평양잡지』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193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주미제2행서(駐美第二行署)의 재무위원에 임명되어, 하와이에서 인구세(人口稅), 애국의연금(愛國義捐金) 등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동지회, 국민회, 애국부인회 등을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으며, 이승만과 함께 동지회 대표로 참여하여 선전 활동에 주력하며 對日戰을 준비하기도 했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가 개최되자. 안현경(安顯景) 선생과 함께 동지회중앙부(同志會中央部) 대표로 참가하여 중일전쟁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민족대단결과 독립전선에 역량을 집중할 것을 결의했다. 그 결과 같은 해 8월 미주지역 독립운동 지원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었으며, 안원규(安元奎) 등과 함께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의사부(議事部)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위원으로 임명되어, 워싱턴에 있으면서 대미(對美) 외교활동과 선전활동을 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적극 모금하기도 했다.

국내로 귀국한 선생은 1993년 서울에서 사망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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