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윤봉길 의사 홍구공원 의거 제90주년에 즈음하여
조은희 | 기사입력 2022-04-27 17:16:40

[충북남부보훈지청 보훈과 김명식] 1910년 8월 29일 오백여년의 왕조를 유지하던 조선왕조는 당시의 서세동점 (西勢東點), 약육강식(弱肉强食),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시기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여 뒤쳐진바, 당시의 아시아에서는 열강이라 할 수 있는 일제의 간악한 침략정책에 의하여 제대로 항거다운 항거를 하지 못한 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1897년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는 등의 을미개혁을 단행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위정자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대한제국 수립 13년만에 일제에 의하여 식민지로 전락하여 36년 동안 암흑기 망국민의 서럽고 원통한 생활을 강요당하여만 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일제 식민지 정책은 더욱 공고화되어 가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여 경향각지, 국내외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독립만세의 열기가 고조되어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등 독립운동의 열기가 한층 달아 오르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3.1운동 10년이 경과되어 가던 1930년대, 그 동안의 독립의 열기는 점차 식어지고 임시정부내에서도 파벌싸움으로 지지부진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은 노골화 내지 점차 공고화 되어 독립운동의 길은 끝이 보이지 아니할 때 그야말로 침체기를 벗어나 독립운동 방향의 일대 대전환의 분위기가 지극히 필요한 때였습니다.


이 절박한 시기에 독립을 위해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말을 남기고 조국을 떠난 사람이 있었으니 충남 예산 출신의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 의사입니다.


이말은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비장함과 숙연함이 배어있는 것으로 평소의 독립운동에 대한 윤의사의 기개를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 1932년 1월 상해사변을 연이어 도발하면서, 대륙으로 침략한 것을 기념하고, 또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맞추어, 중국의 상하이(上海) 홍구(虹口)공원에서 전승축하 관병식과 일왕축하 행사를 계획합니다.


채소장사를 가장하며 일본군의 감시를 따돌리고 정보를 수집하던 윤봉길 의사는 이 날짜를 거사일로 삼고, 김구 선생을 찾아가 물통폭탄(일본수뇌부 제거용) 및 도시락 폭탄(자결용)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고 거사 3일 전인 4월 26일 한인 애국단에 가입합니다.


1932년 4월 29일 의거 당일 김구 선생과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도 합니다. 윤봉길 의사가 6원을 주고 샀다는 시계를 김구 선생의 2원짜리 시계와 바꾸자며 “제게 남은 시간은 이제 1시간 밖에 소용없습니다.”라고 한 이야기 입니다. 김구 선생은 목이 메이며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며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홍구공원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11시 50분경,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끝나갈 즈음, 윤봉길 의사는 기념식장 단상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고, 천지를 진동할 굉음과 비명으로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


일본 육군대신을 역임한 시라카와 (百川義則)대장(사망), 해군 제3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 해군 중장(우안 실명),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육군중장(좌하지 절단), 무라이(村井倉松) 주중 총영사(부상),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주중공사(우하지 절단), 가와바타(河端貞次) 거류민단장(사망), 토요다 민단서기장(부상) 등 7명의 군인 및 관료들이 사상(死傷)되는 장쾌한 성과를 거둡니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에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18일 일본 오사카 위수형무소로 이동되어,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에서 총살로 순국합니다.


이 거사는 단순히 조선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거사 당일 현장에는 많은 군중들과 기자들이 운집해 있었기에, 의거 소식은 급속도로 세계 각국으로 전파됩니다.


특히 중국에 영향을 많이 끼쳤는데, 1931년 일본이 획책한 만보산 사건으로 한중 농민들 간 생긴 분쟁으로 불편한 관계가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고, 국민당 총통 장제스(蔣介石)는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했습니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해주기 시작하여 해방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침체기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만난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의 삼자회담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25세의 나이로 일본의 전승 및 일왕 생일 축하일 기념시장 단상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침략자의 수괴들을 사상케 하고, 순국한 매헌 윤봉길 의사,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인적이 드문 가나자와시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봉분 및 표식없이 평장으로 안치되었다고 하는데 정말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야만적 행위인 것입니다.


이는 윤봉길 의사의 민족과 동포를 위한 거룩하고 숭고한 뜻을 숨기고 또한 왜곡하고,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이 독립운동의 성지도 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야만적 행위도 서슴지 않고 자행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해방 후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송환하기 위한 유해 발굴작업도 유해를 표식이 없는 평장으로 알 수 없게 해놓아 유해 찾기도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은 과거 인접국에 대한 침략행위에 대한 진정한 반성 내지 사과와 그후의 행동과 실천에 있어 가시적인 성과가 별로 없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차하면 지금도 역사왜곡, 독도침탈 야욕 등의 도발을 끊임없이 자행하는데 단시간 내에 근절될 것 같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만 탓해서는 될 것이 아니며, 우리의 국력을 신장하여 일본을 능가하면 역사 왜곡 및 독도침탈 야욕은 저절로 근절될 것입니다,


90년전인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 장쾌한 의거를 상기하며, 국권의 상실기에 조국의 광복과 동포를 위하여 초개와 같이 신명(身命)을 바친 고귀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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