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타임뉴스=박승민 서태안 Reset]오늘날 태안군은 기원전 1,200년 경 카산드라의 예언을 무시하고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들여 모국을 멸망시킨 전철을 여지없이 걷고 있다.
로마 공화정 시대를 개척한 루키우스 부르투스의 품격 있는 수장은 5년 전 사라졌고, 예언자 카산드라인 태안군전피해민대책위원회(위원장 전지선)의 예지력은 먹히질 않는다.
민주공화정의 아버지 부르투스의 두 아들(불통, 먹통)은 드라마같은 대사로 대중을 호도하고, 암울한 미래는 프리즘을 비추며 무지개 빛 조작에 나섰다. 때를 맞춘 역도(逆徒)의 자식(군정, 민정)들은 타고난 금권주의 날개를 달고 거짓과 허구를 8개 읍면 구석구석 실어 나른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531년 전, 로물로스가 건국한 244년의 왕정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공화정 시대를 활짝 열은 루키우스 부르투스는 원로원을 통해 "먼저, 어느 누구도 로마가 왕에 의해 통치 받음으로서 고통 받지 않는다. 어떤 왕의 간청이나 뇌물에 의해서도 이 새로운 자유(Freedom)는 번복 될 수 없다" 고 선언한다.
이로부터 약 482년 간 공화정의 꽃을 피우며 오늘의 민주주의는 싹을 틔웠다. 두 명의 콘솔(집정관)로 시작된 공화정은 이후 1,000년을 이어갈 로마의 초석을 다지며 거대 제국의 태동을 예고했다.
콘솔(집정관)이란 ’소 두 마리가 함께 쟁기를 끈다‘ 는 뜻으로 '공화' 의 핵심을 뜻하며 ’함께 일한다‘ 는 의미로 오늘날 민주주의 본향으로 남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으로 제정했다. 여기서 '공화국' 이란 ’로마의 콘솔 2명‘ 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입법, 행정, 사법 삼권의 수장인 3인의 콘솔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삼권이 확립된 대한민국은 '자유' 가 주어진다, 행위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며 국가가 정한 의무를 지킬때 그 '권위' 로부터 소극적 자유(liberty)를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태안은 그 권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 명의 콘솔과 십여명의 홍위병들이 난립한 군정은 왕정을 꾀하는 망상에 사로잡힌 루키우스의 두 아들(불통, 소통)로부터 소극적 자유까지 붕괴된다.
당시 아버지 부르투스는 "어떤 왕의 간청이나 뇌물에 의해서도 이 새로운 자유(Freedom)는 번복할 수 없다" 고 했던 선언했다. 이를 어기고 왕정의 복권을 꾀하며 역도가 된 두 아들, 이들의 반역에 대해 아버지 부르스는 그들에게 추방이 아닌 사형을 언도한다.
당시 그는 사형 집행장에 참석해 두 아들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목도하며 형장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지막 순간 눈을 마주치며 눈물을 보였다는 기록도 남아있으나 두 아들의 사형은 공화정에 대한 연민이 두 아들의 죽음보다 소중했던 점은 펙트로 남았다. 공인이 걸어가야할 ' 엄정' 그 자체였다.
그토록 냉엄했던 부르투스의 정신, 그가 남긴 신독(하늘신, 땅신 사이 홀로 살아가는 자신)은 곧 다가올 세계정부의 힘이 된다. 일각에선 이를 공인의 품격(品格)이라 해석한다.
그렇다면 태안군수의 품격은 어떨까? 군민의 평판을 빗댄다면 '그들만의 그라운드에서 그들만의 자찬을 빠진 나르키소스 (Narcissus) 증후군에 매몰됐다. 는 소문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나르키소스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빠진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을 일컫는다.
한편 6만여 군민 대다수는 카산드라 증후군(Cassandra Syndrome)에 빠졌다. 카산드라는 절세미인 트로이아 공주를 말한다. 신화에 따르면, 태양의 신 아폴론은 그녀의 미모에 홀딱 빠져 청혼을 하였으나, 단호하게 거절당하자 예언의 능력은 주되 설득력은 빼앗는 앙칼진 복수에 한다.
이로 인해 그녀의 예언은 백발이 적중하였으나, 설득력을 빼앗긴 그녀의 말을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9년의 전쟁에서 승패가 불부명해진 '그리스 도시 연합군' 은 오딧세우스의 제안으로 '트로이 목마' 를 남기고 퇴각한 것으로 위장했다.
이때 예언가 카산드라는 군중을 향해 "절대로 성 안으로 들이지 말고 불태우라" 고 절규하였으나 설득력을 빼앗긴 그녀를 믿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먼 역사를 알지 못하면 먼 미래를 알 수 없다‘ 고 했던가! 2차 대전의 명장 처칠이 그의 트랜드 마크인 시가(segal) 파이프를 물고 남긴 언명이다.
이 기고문은 "불통과 소통의 대명사인 두 아들과 군정 민정을 총칭한 홍위병" 들도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겠으나 ’나는 모르쇠‘ 로 주장하며 깊은구렁(타르타로스)속으로 무모하게 나아갈 것은 자명하다.
다만 군민 중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에게 ’매듭을 풀어가는 비법(秘法)은 역사에 숨어 있어!‘ 라는 처칠의 명구에 이제라도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닌가 조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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