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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세상] 가면의 시간, 가장 익숙한 얼굴로 다가오는 그늘에 대하여

일러스트 제작 김정욱

[사람과세상=김정욱] 악(惡)은 결코 뿔 달린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 가장 신뢰하는 친구의 다정한 목소리, 혹은 나를 위한다는 명목의 가족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조용히 스며듭니다.

우리는 흔히 악을 거대한 사건이나 흉악한 범죄 속에서만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권순희 작가가 응시하는 악의 본질은 훨씬 더 일상적이고 친밀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매일 아침 건네는 무심한 비난일 수도 있고, '너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나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통제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경계의 벽은 낮고, 그 낮은 벽을 타고 넘어온 상처는 독(毒)이 되어 심장 깊숙이 박힙니다. 타인이 휘두르는 칼날보다 친밀한 이가 건네는 차가운 외면이 더 아픈 이유입니다.

악은 때로 지나친 '동정'이나 '조언'의 탈을 씁니다. 상대의 고통을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도구로 삼거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영혼을 잠식해 나가는 일. 이러한 소리 없는 폭력은 우리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관계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들은 우리의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휘두르는 언어의 칼날은 정확히 우리의 가장 아픈 곳을 관통합니다. 악이 의외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마주해야 할 가장 서늘한 진실 중 하나입니다.

관계를 끊어낼 수 없기에 우리는 종종 그 그늘 밑에서 스스로를 갉아먹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직면해야 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나의 존엄을 해치고 영혼을 위축시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도 배려도 아닙니다.

가까운 이의 얼굴 뒤에 숨은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움이 아니라 '거리'를 두는 용기입니다. 

나를 지키는 적당한 거리만이, 악이 선의를 잠식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패가 됩니다. 오늘 당신이 마주한 그 익숙한 미소 뒤에, 혹시 당신을 멍들게 하는 차가운 진실이 숨어 있지는 않나요?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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