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06.30. 일 이승만·노태우 前대통령 아들 포함해 건립추진위를 발족하면서 4·19 시위 주역들까지 참여해 “통합의 계기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기념 발족식을 가졌다.
역사 왜곡, 진실은폐, 좌우 이데올로기 심화, 미국에 의해 계획된 건국신화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하인드 스토리 장본인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태어난지 148년, 대한민국 건국 75년 만에 한반도의 자주성과 민족주의는 완벽히 사라질 서막은 미국 주도하에 이렇게 축포를 쏘아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8.15. 대한민국 헌법 제55조제1항은 『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 라고 제정했던 장본인이다.
곧 이어진 06. 25. 전쟁을 3년 만에 끝낸 그는 1954. 11. 27. 일 헌법 부칙으로 <단기 4287년 11월 27일 헌법개정> <제3호,1954. 11. 29.>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로 개정하면서 자신만이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 는 헌법에 적용받지 않는다는 법령을 신설한다.
이 부조리한 사건은 영구집권을 꾀한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반올림) 시나리오로 비판을 받았다. 염치를 저버린 비화는 확산되었고 그예1960. 04. 19. 혁명의 집중 포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이 사태가 더욱 확전 될 기미를 보이자 그는 도피처로 모국을 택한다. 대통령 스스로 건국한 자국을 저버린 얼룩진 그의 초상화는 자본의 유령(기념관 발기인)에게 신화로 재탄생되면서 이승만 기념관으로 귀환을 꾀한다.
그런 그의 반역적 기질은 1950. 06. 28. 일 전쟁발발 3일만에 그 정체를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정부요직은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교두보가 될 수 있는 교량 전부를 폭파한다. 돌아가거나 돌아오지 못할 이 염치없는 행동으로 수 만의 피눈물로 한강은 넘실댔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는 전쟁이 끝난 익년도(1954년) 영구집권 개헌을 주도하는 파렴치를 자행한다.(역사 재평가, 한강다리 폭파 북한 남하 저지 위한 고육책! 진실 공방 2보에서 보도합니다.)
△ 이승만 사사오입 VS 염치(廉恥)를 중히 여긴 사건 3.
사건 1: 미국 헌법은 연임 제한을 두지 않는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연임후 3선 불출마 선언으로 건국 23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4년 임기 재임 가능 3선 불가 전통을 여지없이 이어간다. 염치를 우선한 인정(仁情 마땅히 할 일은 한다)으로 평가 받고 있다.
사건2 : 기원전 399년, 피소 신분인 소크라테스의 주된 법정(法廷) 공소 사실은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 를 선동한 죄다. 즉 참소(讒訴 엮어서 무고)사건으로 기록된다. 그의 최종 판결은 "추방 or 벌금 or 사형" 선택은 그에게 있었다. 최후 변소에 나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 알고 있기에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지혜를 나는 갖고 있지 않다" 면서 "다만 죽는 것 보다 부끄러움을 더 두려워한다" 라고 주장하며 '사형' 을 택한다.
사건 3: 1909. 10. 26일 안중근, 그는 1909. 2월 경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해 그해 10. 26. 일 만주 하얼빈역 근처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다. 안중근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항소" 를 생각했다. 이때 간수로 근무했던 미즈노는 안중근에게 "항소하면 조선의 지사가 목숨을 구걸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느냐" 라고 충고하자 즉각 항소를 포기하고 조기 사형을 내세운다.
실상 일본은 안중근의 조기 사형 등 강력한 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만일 호소가 지체될 시 원하지 않은 제2의 영웅탄생을 염두에 두고 익년도(1910년) 03. 26. 일 오전 10시 뤼순형무소를 통해 '죄목 살인' 을 언도한 후 교수형에 처했다.
△ 위 3개의 사건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염치란..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론을 깊이 들여다 보자. "(자신은)불의를 행하고 있지 않으니 나쁜 것이 확실한 추방형, 벌금형, 징역형을 요구하기보단 차라리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아직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 라고 했다.
그러면서 "벌금형은 자신이 가난해서 낼 돈이 없고, 징역형은 감옥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종살이를 해야 하니 확실히 나쁘고, 추방형은 자신이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이가 될 뿐더러 아테네 시민들도 나의 논변을 이렇게 싫어하는데 다른 폴리스(27개 도시형 국가를 일컬음) 사람들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어 그는 "죽음은 분명 영원히 잠들어 무(無)로 사라지는 일이던가! 아니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저승으로 향하는 것일텐데 만일 전자라면 세상에서 가장 개운하고 행복한 잠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고, 후자라면 저승에서 만날 신들과 영웅들, 역사 속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보고 대화로 만날 기회일 것이니 죽음이 딱히 나쁠 일 없지 않겠느냐" 라면서 나쁜 것이 확실한 추방이나 벌금보다 좋고 나쁨이 분명치 않은 죽음을 택하겠다고 했다.
오늘날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겉으로 드러난 사실 뒤에 감추어진 실체' 는 염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승만이 그토록 원했던 영구집권의 부조리한 권위의 탐닉을 넘어, 탐욕스런 자본주의를 욕망하는 의도를 이승만 기념관으로 포장했다. 과연 이들은 후대를 향해 '염치를 갖고 살아왔다' 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들 외 시민에게 묻는다.
등록
등록
댓글 더 보기
댓글 새로고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