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하 선생은 유학을 깊이 수학하고 대한제국에서 공주군수를 지내는 등 관료로 일하다가 1910년 항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만주 유하현에서 박장호·조병준·백삼규 등과 교민들의 애국교육사업에 주력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교통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0년에는 광복군사령부 선전부장, 정보국장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임시정부와 인연을 맺은 양기하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면서 한국노병회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1924년 만주의 무장 독립 운동 계열로 복귀했다. 복귀 후 통일군정부인 참의부에 협력하다가 1927년 참의부 제3행정구 위원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고, 1930년 전후에는 조선혁명당에 참여하여 만주 지역 무장 단체 통합에 앞장섰다.1932년 신빈 사건으로 조선혁명당 지도부가 대거 체포되면서 와해 위기에 놓였을 때 선생은 만주 지역의 조직을 사수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쳤고 관전현에서 주둔하던 중 일본과 만주 군경대의 습격을 받아 전투를 벌이다 결국 가장 먼저 전사·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