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서부보훈지청, 우리고장 독립유공자 알리기 열번째 ‘윤봉길 의사’
홍대인 | 기사입력 2016-04-21 13:35:17
[충남=홍대인 기자]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에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에는 매곡 성주록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익혔다. 전통 교육을 받으면서도 그는 당시 민족잡지 「개벽」 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해 갔다.

1926년에 그는 산책을 하다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한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그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바로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니,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다.

그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주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또한 1927년에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 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을 담은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여 민족 얼을 부흥하고자 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농가 부업 장려 ·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 국산품 애용과 일화 배척 · 생활 개선 등을 추진했고,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 인물들을 규합했으며, 위친계(爲親稧) · 수암체육회 등을 결성하여 친목 도모와 체력 향상에도 힘썼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촌계몽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운동이 결국 독립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행복은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1929년 12월 16일자 일기에 그는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 라고 적었다. 이는 그가 막연하게나마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1930년 3월 6일 그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되었고,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하던 중 임시정부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는 김구 선생과 함께 의열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 라는 신문 보도를 접하게 된다.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그는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김구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그는 “나는 적성(赤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상해 병공창(兵工廠)의 주임이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윤봉길 의사는 4월 27일과 28일에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 장소를 철저히 눈에 익혀두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펼쳐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 대장 ·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 · 우에다 중장 · 주중공사 시게미쓰 ·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 · 상해 총영사 무라이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나가던 오전 11시 40분 경, 윤봉길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기고 안전핀을 제거한 후 앞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이를 투척했다.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폭발했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즉사하고 노무라 중장 · 우에다 중장 · 시게미츠 공사 · 무라이 총영사 ·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은 실명 · 다리 절단 등의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하면서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우리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피체된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고 말하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그는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여 총살당했으니, 이 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5년 6월 1일 그가 태어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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