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서부보훈지청, 우리고장 독립유공자 알리기 아홉 번째 ‘김좌진 장군’
홍대인 | 기사입력 2016-04-19 18:57:51
[충남=홍대인 기자] 백야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에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 말타기 · 병정놀이 등을 즐겨했는데, 동네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 역할을 했다. 또한 삼국지와 수호지를 통달할 정도로 읽고 군사학에 관련된 책을 탐독했으며 무술연마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러한 강직한 성격 이면에는 약한 사람을 돕는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병정놀이를 할 때 대장기에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즉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뜻을 유년시절부터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남루한 옷을 입은 친구를 보면 자신의 옷을 그의 옷과 바꿔 입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거지를 보면 밥을 먹이고 자신의 옷을 입혀 보내기도 했다.

1905년 그는 30여 명의 집안 노비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다.

그 후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무관학교에 입학했고, 다시 홍성으로 돌아와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법률전문과를 설치하고 개화 · 신학문 등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다.

1909년에는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기호흥학회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학문 증진과 민중 계몽을 위해 1908년 1월에 조직된 단체로써,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교육 사업이었다.

그는 1910년을 전후하여 서울 관수동에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위장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고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차려 해외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자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1911년 6월에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13년에 출감한 그는 홍성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다시 홍성헌병대에 10개월 수감되었다.

홍성헌병대에서 풀려난 후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에 부사령을 상주시켜 국내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책임을 맡겼는데, 초기에는 이진룡이 부사령에 임명되었고 이진룡이 피체된 후에는 김좌진 장군이 그 책임을 맡아 파견되었다.

그는 만주로 파견되기 이전 국내에서 대한광복회를 혁신 강화하는 모임 및 길림광복회를 조직하는 모임에 참여했고, 대한독립의군부에서 활동하며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1919년 3월 그는 군사전문가들과 함께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길림군정사를 조직했고, 그 해 가을 북로군정서에 참여했다. 북로군정서의 중앙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구성되었는데, 총재부는 대외 및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사령부는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사령부 총사령관으로서 이장령 · 나중소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 독립군 양성의 중책을 맡았다.

1920년 2월, 그는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사관연성소를 설치했다. 그가 사관연성소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교관 이범석 · 김규식 등이 훈련을 담당했다. 사관연성소는 역사 · 군사학 · 병기사용법 · 부대지휘법 등을 교육하고 엄격한 군기와 규율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20년 9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으로 구성된 교성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이때 조직된 교성대는 최정예 부대로써 이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군의 주축이 된다.

3․1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되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했고, 1920년 6월 7일에는 봉오동에서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했다(봉오동전투).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훈춘사건을 일으켜 간도에 출병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 천수평전투 · 어랑촌전투 · 맹개골전투 · 만기구전투 · 쉬구전투 · 천보산전투 · 고동하전투에서 3,3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섬멸하며 승리했다(청산리대첩). 특히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대첩의 대표적 전투인 백운평전투 · 천수평전투 · 어랑촌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북로군정서군이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훈련이 잘 되고 박격포 2문 · 기관총 4정 · 총기 약 800정 · 수류탄 약 2000개를 갖추는 등 무장이 구비된 정예부대였기 때문이다.

청산리전투 이후 그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장군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 계열과 이범윤을 중심으로 한 복벽주의 계열이 연합하여 조직된 단체였다. 그는 대한독립군단에서도 총사령관을 맡아 무력투쟁을 전개했으며, 군자금과 독립군을 모집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1925년에 대한독립군단과 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신민부는 무장 활동 · 교육 및 홍보 활동 · 산업 활동 등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한인동포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는데, 그는 신민부를 조직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총사령관 및 군사부위원장으로서 군사부문의 책임을 맡았다. 또한 의무금과 모연금을 모집하여 독립자금으로 활용함으로써 무장투쟁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신민부는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동시에 성동사관학교 졸업생을 바탕으로 정규군을 구성하여 5개의 보안대와 그 통제를 받는 별동대를 두었는데, 이는 신민부 무력투쟁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는 성동사관학교의 부교장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보안대와 별동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계속 국내에 밀사와 공작대를 파견했다. 1925년 3월에는 신민부원을 파견하여 조선총독 암살을 시도했고, 특수공작대를 파견하여 국내의 작전지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민부는 1928년에 민정파와 군정파로 분열되었다가 해체되었다. 신민부가 해체된 후 북만주 지역으로 이동한 그는 당시 만주지역에서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하여 1929년 7월에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다. 그는 종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일관되게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추구해 왔었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대처하고 만주 동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1930년 1월 24일에 중동선 산시역 부근 금성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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