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서부보훈지청, 우리고장 독립유공자 알리기 다섯번째 ‘김인전 선생’
홍대인 | 기사입력 2016-04-08 18:49:36

[충남=홍대인 기자] 김인전 선생은 1876년 10월 7일에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다.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의 침략이 완전히 표면화되면서부터 만주 ·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했고, 1919년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의 소속원으로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 2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議政院) 재무예산위원(財務豫算委員)으로 피선된 그는 인구세(人口稅) 징수 · 국내외에서의 독립공채 발행 · 구국 활동을 위한 재정단(財政團) 조직 등 임시의정원 재정 업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동년 4월에는 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政務調査特別委員)이 되어 군사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는 임시정부의 대외군사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이므로 그는 장기적 독립전쟁을 위한 지구력과 규율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군사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군사회의 개최 · 군인학과 개설 · 사업부 설치 · 국민의용병 모집 등을 추진했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들로 인해 1920년 4월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어 1921년 5월 사임할 때까지 임시의정원을 이끌었다.

1920년 9월에는 임시정부와 태평양회의 연구회가 협의하여 국내외 각 방면에서의 활동을 분담하게 되었는데, 그는 남한 지역 기독교 세력과의 연락책임자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동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 거류민단의 본구 의원에 당선되어 한진교 · 서병호 · 이유필 등과 함께 교민의 복지증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臨時公債管理局長)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에는 대한예수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 서기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선언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안창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설립하여 한·중 간 유대강화에 기여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학무총장(學務總長) 대리에 임명되기도 했다.

동년 8월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서기에 임명되어 자금조달에 전념했고, 11월에는 의정원 의원 25명이 연서한 독립청원서를 태평양회의에 제출했다.

1922년 2월에는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에 선출되었으며, 동년 4월에는 제4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의정활동을 이끌었다.

동년 7월에는 독립운동자들의 단합을 위해 안창호 · 김덕진 · 최일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했고, 9월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22년 10월에는 김구 · 조상섭 · 이유필 · 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발기하여 그 이사 및 경리부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군대 양성과 독립전쟁 비용 조달에 주력했다. 동회는 1932년 10월에 해산되기까지 무장 항일투쟁을 위한 간부 양성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헌신하던 그가 1923년 5월에 과로로 순국하니,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했고 상해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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