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꿈꾸던 청년, 르윈
김응택 | 기사입력 2015-06-30 17:33:03

[부천=김응택기자]미얀마 양곤대 교정의 작센 건물이 맑은 색으로 서 있고 그 앞으로는 넓은 길이 이어져 있다. 청년 르윈이 매일 오가던 길이다. 그리고 중년 르윈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길이다

지금도 그 건물이 그대로인지, 그 길이 똑같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랜 기억을 더듬어 그림에는 담았으나, 가 볼 수도 없고 누구에게 묻기도 그렇고...

나와는 많이도 다퉜던 사람이다. 멀고도 먼 한국 땅에서 자기 나라를 바라보며 운동의 원칙을 얘기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를, 나는 자주 공격하곤 했다

원칙보다 자존심보다 사람을 먼저 보라고. 서로 잦게 충돌했고, 언성을 높이고, 도끼눈을 뜨고, 결국은 같이 일하는 것을 포기했더랬다

드물게 길에서 만나면 시시하게 안부를 묻기는 했지만, 협력하는 일은 없는 상태로 15년이 흘렀다. 그 사이 그는 많이 아팠고, 아픔을 이기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623, 부천의 한 식당에서 만난 그는 웃는 얼굴로 모자를 벗었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안 보였다.

그림을, 언제부터 그린 겁니까?

“2006년에 시작했으니까 이제 10년 됐네요. 그 전에는 그림을 그려본 적도 없고 그리려고 생각해 본적도 없었어요. 어느 날 문득, 제가 좋아하는 아웅산 장군, 수치 여사 같은 분들 모습을 직접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에 친구들 몇 명하고 같이 시작했는데 다들 중간에 그만두고 지금은 저만 그리고 있어요. 그림동아리 미술시간에서 활동하는 김정아 선생님에게 연필소묘를 배웠어요. 서양화가 황영락 선생님에게 유화를, 김흥수 선생님에게 수채화를 배웠지요. 처음에는 동그라미도 못 그렸는데, 지금은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사람들이 다 놀라요.(웃음)”

2013년 아웅산수치 여사가 한국에 왔을 때 직접 그린 초상화를 선물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그랬어요. 행복했어요. 그 초상화는 사진을 보고 그린 게 아니라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그린 겁니다. 그 그림을 받고 수치여사가 정말 행복해 했어요. 저도 행복했어요.”

그의 얼굴에 소년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한국에 20년째 살고 있는 미얀마인 르윈의 미소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 88년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는 민주국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나, 1962년 네윈의 쿠데타로 기나긴 독재와 가난을 맞아들였다. 견디다 못한 국민들이 1988년 초부터 본격적인 저항운동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저항과 혁명의 열기는 고조되고 계엄령이 선포되는데, 미얀마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수치 여사는, 총부리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시위 대중을 향해 연설하며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된다.

19888888분을 기해 전국의 학생, 승려 등 많은 시민들이 일제히 일어나 민주항쟁을 벌이며, ‘군부퇴진, 다당제와 직선제 시행등을 요구한다

이에 주춤한 네윈은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곧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최소 2천명, 최대 2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사건의 진상과 정확한 희생자 규모는 지금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군부는 불법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나라이름마저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꿔버렸다.

같은 해 수치여사와 정치적 동지들은 정당 NLD(민족민주동맹)를 창당하고,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의 82%를 차지하는 큰 승리를 한다. 그러나 군부는 이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정권이양을 거부했으며, 오히려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차지하고 나라를 감시와 억압, 자유박탈과 가난으로 몰아넣었다

군부는 국회의원 당선자,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였다. 수치여사를 가택연금하고, 수천 명을 감옥으로 끌어가 모진 고문을 했고, 10만여 명을 해외로 내몰았다.

수치여사는 총 15년에 달하는 긴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정치적 지도자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다. 국민의 지지도 계속 이어졌다. 여사는 가택연금 해제 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20124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13년에는 광주를 방문하여 2004년 수상했으나 직접 받지 못했던 광주인권상을 직접 받았다.

8888때 르윈은 양곤대에서 학생회를 이끌었다. 학생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며 혁명을 향해 나아갔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쫓기고 지쳐간다. 때마침 한국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산업연수생을 들여오기 시작했던 터다

혁명가는 더 이상 국내에서 버틸 수 없음을 절감하고 친구들이 만들어다 준 위장 여권으로 산업기술연수생이 되어 한국으로 온다. 1996년 일이다.

몇 년 후, 르윈을 비롯해 비슷한 이유로 한국에 와 있던 몇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NLD 한국 지부를 만들고 본부로부터 공식적인 지부로 인정받았다

당시 당원 대부분이 체류비자가 없었는데, 그중 일부가 법무부 출입국의 단속에 걸리면서 신변 보호를 위해 난민인정 신청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아졌다. 꽤나 길고 격렬한 논의 끝에 당원 전부가 한국 정부에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저작권자 ⓒ 타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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