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의 독립운동가 이희경, 나용균, 황기환 선생
최슬기 | 기사입력 2023-04-03 16:56:13


[충북타임뉴스=최슬기]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적극적인 외교활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독립유공자 이희경·나용균·황기환 선생을 2023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활동의 지원군, 이희경 선생

이희경(李喜儆, 1889~1941) 선생은 1889년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태어났다. 순천군 사립 시무학교(時務學校)에서 수학했고, 1905년 4월경 일본 도쿄에 머물며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1905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11년 일리노이대학 의학전문과에 진학하여 1916년 졸업했다.

1911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총무를 맡아 활동했으며, 지방회의 자치제도와 규칙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재미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6년 6월 하와이로 가서 병원을 운영하며 한인사회 의료체계도 마련에도 기여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외교활동 분야에서 활약했다. 1919년 5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군무위원장, 임시회계검사원, 법률기초위원, 외무총장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안창호·서병호 등과 함께 대한적십자회 재건에도 앞장섰다. 대한적십자회는 1905년 10월 대한제국 칙령 제47호에 의해 조직되었으나, 1909년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적십자에 통합되었던 단체이다. 선생은 1919년 7월 발기인 대표로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했다. 곧이어 8월에 임시정부 인가를 얻어 규정을 제정하고, 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초창기 대한적십자회의 토대 구축과 체제 확립에 힘썼다. 또한 간호원양성소와 병원 설립도 추진하여 독립전쟁에 필요한 의료진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필요한 재정 마련을 위해 1919년 10~11월 미국 시애틀·샌프란시스코·워싱턴·로스앤젤레스 등의 한인사회를 직접 찾아가 선전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미주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이끌어냈다. 대한적십자회 회원 모집과 지부 설립을 주도하여 대한적십자회 북미지부를 설립하고, 의연금 4,000여 원을 모집하여 상하이 본부로 보내는 성과를 거뒀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미의원시찰단(美議員視察團)’이 상하이를 방문하자, 교제위원에 임명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8월 상하이 아스타하우스 호텔에서 개최된 환영회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진정서」를 미국 의원들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실상을 알렸다.

1921년 5월 러시아와 외교교섭을 위해 임시정부 특별전권대표로 안공근과 함께 모스크바로 파견되었다. 임시정부와 러시아 정부·국제공산당과의 관계를 수립하여 자금 지원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922년 1월경 모스크바에 도착, 6개월여간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923년 1월경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다시 의학 공부에 매진했다. 베를린대학 부속병원에 근무하면서 호흡기 분야를 전공하였고, 독일에 체류하는 한인 유학생들의 실태와 관련 소식을 미국 한인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1924년 미국으로 돌아와 독일에 유학하는 어려운 학생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뉴욕지방 한인들과 함께 구제금을 모집하여 유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925년 4월에는 서재필·유일한 등과 함께 유한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회사 서기로 근무하며, 각종 사무·출장업무를 수행하며 회사발전에 매진했다. 1929년경부터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2년여간 미국 뉴저지의 위생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건강 회복 후, 펜실베니아 소재 병원에서 의원으로 근무하였다. 1937년 중순 국내로 돌아와 호흡기 전문의로 활동하였다. 서울 인사동에 병원을 개업하고, 언론에 위생과 관련된 글을 게재하는 등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41년 6월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2·8독립선언과 국민대표회의의 든든한 조력자, 나용균 선생

나용균(羅容均, 1895~1984) 선생은 1895년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학부에 입학,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대두로 독립운동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되자, 한국인 유학생들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8년 최팔용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1919년 2·8독립선언 발표에 기여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21년 5월 제8회 임시의정원 회의 때까지 적극적인 의정 활동을 펼쳤다. 임시의정원 법제위원회 이사와 위원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관제 및 헌법 개정에 매진했다. 또한 국제연맹회의 안건 수정 특별위원과 정무조사특별회원을 지냈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두 차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촉진 연설회에 발기인으로 활약하였다. 김병조 등과 함께 연설회 개최를 주도하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5월 중 제2회 연설회 직후에는 참석자 300여명의 동의를 얻어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조직을 촉진하기 위한 조직위원 20인 중에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8월 상하이·베이징(北京)·톈진(天津)의 대표들이 협의하여 국민대표회주비회를 조직하자, 상하이 국민대표회기성회 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11월,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로 향했다.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몽골 등 각국 민족운동 단체 대표들의 모임이다.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인 러시아와 협력을 통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같은 해 3월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에 참여했다.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에 관한 모든 사항을 준비하고자 새롭게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12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고 서기에 임명되어 1922년 5월, 남형우·김철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선언서(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 宣言書)」를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본 주비회는 시세의 추세와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과거의 모든 분규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우리의 독립운동이 재차 통일적·조직적으로 진행하도록 하는 양대 안건하에 국민대표회 소집사항도 준비하고 책임을 부담하여 성립되었음"을 밝혔다. 1923년 유학을 위해 영국으로 향했다. 런던대학교에 재학하며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였다. 1927년 3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를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한국민주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제헌국회 의원과 제4·5·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아울러 제6대 보건사회부장관과 제6대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이후 서울 명륜동에 거주하다가 1984년 7월 6일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유럽지역 외교운동의 개척자, 황기환 선생

황기환 선생(黃玘煥, 1886~1923)은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영문 이름은 Earl K. WHANG이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립협회(共立協會)에서 활동하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주도하여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이다. 1906년 6월까지 레드랜드 지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09년까지 지방회원으로 활동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미군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유럽전선에서 활약했다. 소대장으로서 중상자 구호를 담당하며 독일 베를린에 입성한 부대에 복무했다. 1918년 11월 종전 이후 유럽에 남았다가 김규식의 제안을 받고 프랑스 파리로 이동하였다. 1919년 6월 파리에 도착한 후, 파리위원부에 합류하여 서기장을 맡았다. ????통신전????을 발행하여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1919년 8월 김규식이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맡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자,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활동했다. 선생은 인력의 부재와 재정의 곤란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다. 프랑스·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의 한국침략과 통치의 실상을 널리 알렸다.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 문제를 보고하였고, 1920년 1월에는 국제평화촉진회가 주최한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독립회복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이뤄냈다.

한국인 노동자와 유학생 지원에도 앞장섰다. 1919년 10월~11월,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러시아 무르만스크의 한국인 노동자 500여명을 돕기 위해 프랑스·영국 정부와 교섭을 벌여, 일부가 프랑스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19년 1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는 프랑스로 오는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학교와 일자리를 주선해 주는 역할도 수행했다.

1920년 1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와 협의하여 ‘한국문제대연설회’ 개최를 이끌어냈다. 파리지리연구회대회장에서 열린 이 연설회에는 정치가·언론인 등 각계인사 500여 명이 참석, 성황을 이루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열린 평화회의 최고회의에 이미 제출한 「한국독립안 토론 요구」를 갱신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하였다. 1920년 5월, 월간잡지 ????자유한국????(La Corée Livre)을 간행했다. 불어로 제작하였으며, 한국독립운동 관련 소식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만행과 관련된 내용을 담았다. 유럽의 각 언론기관 및 정부의 유력 인사들에게 발송하여 한국의 현실과 역사·문화를 알리는데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192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런던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어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외교활동을 펼쳤다. 1920년 10월 영국의 언론인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와 협의하여 ‘대영제국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the Korea in Great Britain) 결성을 주도했다. 영국의 국회의원·학자·신문기자 등 60여명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통해 영국인들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냈다. 아울러 한국친우회에서 ①한국 내 사회·정치·경제·종교에 대한 현황을 조사하여 널리 선전할 것, ②한국민족의 정의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에 동정적 원조를 제공할 것, ③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옹호할 것, ④한국에서 박해받고 있는 과부와 고아 또는 정치상·종교상의 희생자에 대한 위안과 구호할 것 등이 결의되는 것에 앞장섰다. 그밖에 런던의 자유교회·세례교회 등에서 한국의 참상을 보고하는 등 영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20년 12월, ????구주의 우리사업???? 간행에 참여하여 파리위원부 설립 이후부터 추진한 대유럽 외교활동을 소개·정리하였다. 1921년 6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이사회 수상회의에 참석한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 사람의 청원」이라는 인쇄물을 배부하고,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도 보냈다. 이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수탈에 대한 실상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하였으며, 영일동맹에 대한 반대안을 공식으로 제출하였다. 같은 해 6월 프랑스 한국친우회 결성식에 참석했다.

1921년 8월경 이승만의 요청으로 워싱턴회의에 제출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열린 워싱턴회의에 참석했고, 회의 이후 하와이에 파견되어 민찬호와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후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23년 4월 미국 뉴욕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국가보훈처에서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실제 모델인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 되는 금년(4월)에 유해를 국내로 봉환할 예정이며, 아울러 그동안 직계 후손이 없어 호적이 없던 가족관계 등록 창설을 추진하여 선생의 헌신을 기억하고 명예를 선양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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