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노동자와 조선을 사랑한 민중의 변호사 ‘후세 다츠지’ 평전
<후세 다츠지>저자 오오이시 스스무,고사명,이형낭,이규수/역자 임희경(지식여행출판사)
김수종 | 기사입력 2017-09-26 11:31:43

[경북타임뉴스=김수종]지난 6월에 개봉되어 화제가 되었던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주인공 박열과 그의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를 변호하던 일본인 변호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양심적인 일본인 변호사는 지난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제 강점기에 많은 조선인을 변호한 위인으로 선정되어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분이다.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1880~1953)선생은 1880년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 농가에서 32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1899년 메이지법률학교에 입학했다. 1902년 학교를 졸업,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고 19034월 후츠노미야 지방 재판소에 사법관 시보로 부임했다.

그러나 동반자살미수로 자수한 어느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해야 하는 현실을 보며, 법률의 사회적인 미비와 적용에 회의를 느끼고는 법복을 벗고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당시 법관을 그만두면서 전통적인 변호사에서 민중의 변호사로 변신한다는 장문의 <자기혁명의 고백>을 선언했다.

인간은 누구라도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정직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이것은 양심의 목소리다

나는 그 목소리에 따라 엄숙하게 자기혁명을 선언한다라는 내용이다.

당시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그는 메이지시대 정치가이며 사상가인 나카에 조민<일년유반>을 읽고서 법관을 탐욕스럽고 잔인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사상 전반은 빅토르 위고<레미제라블>톨스토이러인비전론등의 영향도 받은 것 같다.

이후 가난한 민중들과 일본 내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무료법률상담과 강연회를 여는 등, 주요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고, 사회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선생은 특히,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농민들을 위해 헌신했다.

관동대지진의 잔혹한 조선인학살에 대한 사죄와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의 사죄문을 언론사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조선인 지원활동으로 변호사 자격을 세 번이나 박탈당하고 두 차례나 투옥되기도 한다.

1911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로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1919년에는 재일조선유학생들이 선포한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 송계백 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호를 맡았다.

당시 법정에서 선생은 일본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한 사실을 지적하며, “일본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원조한다고 하면서 어째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원조하지 않는가?”하고 검사에게 질문해서 법정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을 폭로하는 동시에 조선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것이다. 1920년대에는 의열단원으로 일본 황궁의 니쥬바시에 폭탄을 던진 이중교 투탄의거를 일으킨 김지섭 의사의 변호를 맡았다.

선생은 또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본군 계엄사령부와 경찰에 의한 조선인 폭동조작이었음을 비판하다가 치안당국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천황가 암살을 기획한 이른바 대역사건의 모의로 체포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제국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조사 행위를 명분으로 조선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을 때에는 나주지역 농민들을 위해 510만평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여, 총독부의 토지조사행위를 합법을 가장한 사기로 규정하였다.

천민차별철폐를 위한 단체인 형평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한반도와 타이완의 식민지 민족문제와 계급, 신분차별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인도주의와 사회는 평등해야한다는 믿음으로 매년 250건 이상의 재판을 맡았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농민, 노동자, 부락민 등의 권리보호를 위해 일했고, 국외에서는 한반도, 타이완 등 식민지에서의 민족 및 민중의 권리보호를 위한 각종 사건에 투신했다

조선에도 수차례 방문하여 강연과 함께 노동자, 농민 및 공산당에 대한 변호를 하기도 했다.

그가 맡은 주요한 사건은 도쿄시 전기공사 요금인상 반대소요사건(1906), 도쿄시 전기공사 파업투쟁(1911) 쌀 소동(1918), 천주 사건, 가마이시(釜石) 광산, 아시오(足尾) 동산, 야하타 제철소 파업사건(1919), 군대 적화 사건(1921), 1차 공산당 사건, 관동대지진의 아마카스 사건, 박열 대역사건(1926), 조선공산당 사건, 타이완 농민조합 소요 사건 등이 있다.

그가 맡은 사건 중 가장 파장이 컸던 사건은 일본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인 1932년의 3.15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법정에서 권력을 격렬하게 비판한 그는 법정모독의 징계재판을 받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신문지법 위반으로 3개월 금고형을 받고, 1939년에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형을 2년 선고받고 복역했다

선생은 일본국민의 한사람으로 국내군벌, 파시즘과 싸워서 평화일본의 자유를 되찾으려고 했으나 스스로 되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의 탄압을 도발해서 결국 목숨까지 빼앗길 지경에 놓였다.

일본이 패전한 1945815일은 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생에게 있어서도 해방의 날이었다. 변호사자격을 회복한 선생은 자유법조단을 재결성했고 미타카 사건, 마츠가와 사건, 피의 메이데이 사건, 한신 교육투쟁사건, 도쿄 조선고등학교 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다.

1946년에는 광복된 한국을 위해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하였다. 선생은 1953년 만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고별식 장례위원으로 참석했다. 그는 이런 묘비명을 남겼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きべくんば民衆とともにすべくんば民衆のために) ”

선생의 장례식 때 재일조선인이 낭독한 조사에도 나오듯이 그는 우리 조선인에게 있어 정말로 아버지와 형 같은 존재이고, 구조선과 같은 귀중한 존재였다. 선생과 함께 살고 함께 죽고자 했던 민중, 그중에서도 재일조선인은 항상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활동은 역사교훈실천운동의 정준영 대표가 지난 1999년 일본방문 중 발견한 <어느 변호사의 일생>이라는 서적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다. 선생의 고향인 이시노마키시 문화회관 2층에는 법복과 법관, 자필 등 몇 안 되는 유물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이시노마키 역에서 좀 떨어진 아케보노미나미 공원(あけぼの南公園)에 선생을 추모하는 현창비가 있다. 지난 2010년 일본판 쉰들러, ‘변호사 후세 다츠지라는 제목의 영화가 한일 동시 개봉되기도 했다.

이미 지난 2007년 가을, 도쿄의 고려박물관에서는 <후세 다츠지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이 책은 <후세 다츠지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던, 강연회의 강연록과 후세 다츠지의 행보와 사상에 대한 논고 두 편을 엮어서 만든 책이다.

스스로 일본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고결한 양심으로 빛났던 후세 다츠지 선생. 선생의 생애는 한국과 일본, 더 나아가 전 세계가 나아가야 할 평화와 화합의 길을 제시해준다.

<후세 다츠지>평전의 저자는 여러 명이다. 저자 오오이시 스스무는 <법률시보> 편집장 등을 거쳐, 1980~2004년 주식회사 일본평론사 대표이사를 지냈다

현재 <일본평론사> 회장이다

저자 고사명은 작가로 1975, 외아들의 자살을 계기로 <탄니쇼>와 신란의 사상에 귀의했다

저서로는 <어둠을 삼키다 1, 2>, <현대에 되살아나는 탄니쇼> 등이 있다.

저자 이형낭은 일본 추오대 종합정책학부 교수다. 저서는 <동아시아 국민 국가 형성과 젠더> 등이 있다

저자 이규수는 일본 히토츠바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연구교수다

주요 저서로는 <제국 일본의 한국 인식, 그 왜곡의 역사> 등이 있다

번역자인 임희경은 동국대 일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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