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종로구 무악동 서대문형무소 맞은편 옥바라지 골목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김수종 | 기사입력 2017-05-31 08:41:04

[서울타임뉴스] 예전 지인들과 서울시내 골목답사를 진행하거나 혼자서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닌 적이 많다. 한양도성의 동쪽 방면을 걷는 경우에 늘 마주치게 되는 곳이 신라호텔과 장충단 옆에 있는 장충체육관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이 되어 오는 내용은 국내 최초의 실내체육관이며, 당시 기술과 자본이 부족하여 미국의 자본과 기술 및 필리핀의 인력과 기술이 만나서 완성된 것이라 설명하곤 했다. 말뿐 아니라 때로는 글로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3~4년 전의 일이다. 1차 자료나 2차 자료 정도를 정확히 보지 않으면 그런 문제는 계속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현재 대략적으로 장충체육관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서울시 예산과 국고보조금을 바탕으로, 건축가 김정수에 의해 설계되었고, 감리는 미국의 벡텔사, 그리고 당시 한국 기술 여건상 실현하기 어려웠던 직경 80m 철골 트러스돔(철골트러스 32, 환상형 트러스 13)의 구조설계와 건축설계 부분은 미국에서 귀국한 건축가 최종완이 맡아, 삼부토건이 건설한 한국 최초 실내 경기장이다.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다는 설은 나돌았지만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에 대한 보충적 의견으로 감리를 맡은 미국의 Bechtel Corporation 아시아 사무소가 당시 필리핀에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인들이 단순노무활동을 하는 등의 보조적 양식으로 일부 건설에 참여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한국 자본과 기술로 만들었고, 설계와 시공까지 한 작품이다. 물론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과 감리는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인 건축가의 노력과 감리사의 지원이 있었지만, 필리핀의 인력과 기술지원은 없었다는 것이다.

서론이 길어진 것은 작년부터 롯데건설에서 땅을 밀고 아파트를 짓고 있는 종로구 무악동의 옥바라지 골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옥바라지 골목은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맞은편에 위치한 동네로, 일제강점기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한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물론 나도 한동안 이 골목이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됐던 독립 운동가들의 가족, 해방이후 독재군부정권 시절 민주화인사의 가족들이 생활하며 옥바라지를 한 곳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 47번지 일대다.”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곳을 몇 번 방문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지역의 내용을 아는 사람을 만나거나 명확한 자료를 볼 수는 없었다. 서대문형무소 안에 있는 역사관에서 담당 직원에게 물어보아도 자료는 없다. 종로구나 서울시 물어보아도 자료는 없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옥바라지 골목 안에 있는 대서소, 도장 등의 페인트 글씨와 낡고 초라한 여관 두어 곳, 종로구에 설치한 옥바라지 골목이라고 하는 안내판 정도였다. 이곳이 정확하게 옥바라지 골목이었다는 근거자료는 물론 증언을 해줄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내 생각에도 옥바라지 골목이었던 같기는 한데, “심증은 가는데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이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도 가끔 그곳을 지나가기고 했고, 둘러보면서 안내하기도 했다. 이제는 철거가 끝났고 아파트 공사를 하고 있어 이곳을 스칠 때면 마음 아파하며 다니는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에 옥바라지 골목 안쪽에 있는 행촌동 태생으로 이곳에서 40년 넘게 살았다는 50대의 지인을 만났다. 우연히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옥바라지 골목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았다.

저도 신문을 보고 TV도 종종 보는 사람이라 옥바라지 골목에 대한 기억과 증언이 가능한 사람입니다. 제 기억에 그곳은 70~80년 잠시 옥바라지 골목으로 쓰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주로 형무소의 교도관, 인근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경찰관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그곳이 서대문구와 은평구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에 한곳이었지요. 전철 종점에 버스 종점까지 사람들이 넘쳐나던 곳이지요. 그런데도 부자와 공무원들이 많이 살아서 조폭(건달)들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지요. 골목도 무지 깨끗했지요.”

그렇다면 옥바라지 골목이 독재군사정권 시절 잠시 옥바라지 하던 곳이라는 말인가요. 원래는 형무소의 관사촌 같은 분위기였고?”

가장 번화했던 골목이 옥바라지 골목으로 쓰일 수가 없지요. 예전에 그 골목에는 식당도 하나 없었어요. 아주 멋진 여관만 몇 개 있는 정도였지요. 어린 시절 기억에 형무소에 면회 온 아주머니들은 주로 스카프를 두르고 얼굴을 숨기도 다녔지요. 죄인의 가족이라고. 창피하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곳에 와서 잠자고 식당에서 밥 먹고 했다는 말은 조금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요. 민주화운동 당시에 주변이 개발되면서 잠시 옥바라지 골목으로 쓰인 것은 틀림없지만,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은 솔직히 말도 안 되는 비약입니다.”

그럼 일제 강점기부터 1987년까지 옥바라지는 주로 어디에서 했을까요?”

분명하게 제 기억으로는 현재 말하고 있는 옥바라지 골목은 일단은 아니라고 보고, 원래는 서대문형무소의 남쪽이 가장 허름하고 낡은 판자촌이 많았어요. 소위 쪽방이나, 문간방이 많았던 곳이지요. 지금으로 보자면 독립문극동아파트, 독립문삼호아파트 지역이 옥바라지를 하던 분들이 머물던 숙소였다고 할 수 있는 곳이지요. 그 쪽에 정말 쪽방들이 많았어요. 영천시장도 가까운 곳이었고.”

그렇다면 옥바라지 골목에 있는 글씨와 간판, 여관들은 뭐였지요?”

“1970~80년대 독재정권 시대에 잠시 쓰인 곳이라는 거지요. 그래도 이곳은 땅도 비싸고 집도 비싼 곳이라 부자인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얼씬도 하기 힘든 곳이었어요. 제가 초중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이곳 아이들은 옷도 다르고 소위 때깔이 다른 아이들뿐이었어요. 그런 곳에서 옥바라지하는 사람들이 머물렀다는 것은 과장이 심한 이야기지요. 대부분의 수형자 가족은 영천시장의 안쪽 북쪽, 형무소의 남쪽에 있는 쪽방이나 문간방에서 생활을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튼 새롭고 재미있는 사실이군요?”

형무소 이전 이후에 이곳이 쇠락하여 지난 30년 동안 마치 옥바라지 골목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냥 지역에서 가장 번화했던 골목이었지요. 얼마 전까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형무소 이전 이후에 이곳에 와서 낙후된 모습만 보고 살았던 사람들이라 이곳을 옥바라지 골목이라고 착각하고 산 듯해요. 제가 증거를 대라고 하면 나중에 제 초등학교 동기들 모임에 한번 초대하지요. 당시의 상황을 증언할 사람들은 아직 수십 명은 될 것 같아요. 친구들 한번 모일 때 다시 한 번 봐요.”

물론 추가로 여러 사람들 더 만나고 자료도 구해보아야겠지만, 지인의 말에 따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내용이 많아서 글로 정리를 했다. 아무튼 더 공부하고 연구가 필요한 내용이다.

榴林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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