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뉴스=이남열기자]드라마 「Vikings」에서 라그나르는 아들 비욘에게 묻는다.
“무엇이 보이느냐?” 비욘은 답한다. “권력. 왕의 권력.” 그러자 라그나르는 권력은 언제나 위험하며 “최악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가장 훌륭한 사람조차 타락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는 권력을 요구한 적이 없다. 권력은 자신을 낮추고 그것을 집을 준비가 된 자에게만 주어진다.(IMDb)
이 짧은 장면을 오늘날 지역언론에 대입해 보면 질문은 더욱 무거워진다.
언론이 바라봐야 할 것은 권력의 자리가 아니다. 권력과 시민 사이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언론의 자리다.

[사진설명: 태안관내 한 SNS에서 떠돌아 다니는 태안신문 1면 박수현 도지사와 태안신문 전창균 대표 겸 사계절축제지원 협의회장]
그런데 언론의 대표가 지역사업을 추진하는 협의회의 대표가 되고, 행정기관을 찾아가 사업지원을 요청하고, 그 결과가 다시 자신이 운영하는 신문의 주요 지면을 차지한다면 독자는 묻게 된다.
그 신문은 지금 권력을 감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권력과 함께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가.
물론 지역신문 대표라고 해서 사회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또 박수현 도지사를 만나는 것 자체가 정치적 결탁의 증거가 될 수도 없다. 지역축제를 살려 달라고 요구하는 행위 역시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문제는 거리다.
언론이 행정권력과 가까워질수록 더 엄격하게 자신의 이해관계를 공개해야 한다. 자신이 참여한 단체가 행정지원을 요구했다면 그 사실을 밝히고, 그 사업을 기사화한다면 자신과의 관계 역시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취재와 홍보, 감시와 사업, 공익과 이해관계의 경계가 흐려진다.
라그나르의 대사가 오늘날에도 울림을 갖는 까닭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타락한다는 단순한 비관 때문이 아니다.
좋은 의도로 권력 가까이에 간 사람조차 그 힘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경계에 가깝다.
그래서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에는 권력자보다 더 엄격한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언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도지사의 맞은편에서 질문하는 기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도지사의 맞은편에서 자신의 사업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이해당사자의 자리인가.
두 자리는 모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두 자리에 동시에 선다면, 최소한 독자에게 어느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는 밝혀야 한다.
권력은 언제나 언론을 필요로 한다. 언론 역시 권력으로부터 정보와 접근의 기회를 얻는다. 바로 그 때문에 언론의 독립은 선언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거리를 유지하는가로 증명된다.
태안신문을 둘러싼 지금의 논점도 정치색깔이 아니다. 권력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권력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가. 그리고 그 언론이 지역사회를 향해 요구해 온 투명성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비판하는 사람의 몫이 아니다. 언론 자신의 몫이다.

[사진설명 2026년 8월 19일 안면도사계절축제 지원협의회 창립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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