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뉴스]역사는 늘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왜 어떤 사람은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고,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가. 왜 대부분은 안정을 선택하는데, 극소수는 위험을 감수하며 시대를 바꾸는 선택을 하는가.
인류가 문자를 갖기 이전에도 공동체는 존재했다.국가도,법도,제도도 없었지만 질서는 있었다. 사냥을 이끄는 사람,위험을 먼저 감지하는 사람, 기억을 보존하는 사람, 갈등을 조정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들의 판단은 공동체의 생존을 좌우했다.

결국 권력보다 먼저 존재한 것은 '역할'이었고,역할보다 먼저 존재한 것은 '기질'이었다.
오늘날 행동유전학은 인간의 성향이 단순히 교육과 환경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위험을 감수하는 성향,호기심,사회성,충동 조절,지도력 등은 상당 부분 선천적 기질의 영향을 받으며,이후 환경과 교육을 통해 발현된다.
물론 "유전자가 운명을 결정한다"라는 전제는 될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동일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로 지목되고 있다.
철학 역시 오래전부터 같은 질문을 던졌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았고, 인간의 행동 역시 자연의 필연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칸트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성찰했고, 비트겐슈타인은"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시대는 달랐지만 질문은 하나였다.
인간은 왜 서로 다른가.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왕권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 나선 고타마 싯다르타, 세계의 끝을 향해 진군했던 알렉산더, 기존 질서를 뒤흔든 수많은 사상가와 혁명가들은 모두 안정된 삶보다 불확실한 가능성을 선택했다.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느 한쪽만으로는 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모두가 혁명가라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는다. 모두가 질서만 따르는 사람이라면 문명은 발전하지 않는다. 악이 있어 선은 빛나고 그러기에 헤라이클레이토는 모든 신의 왕은 '전쟁의 신'이라고 주장했다.
자연은 다수를 안정적으로 만들면서도, 동시에 소수의 변화를 만들어낼 기질을 남겨두었다. 조화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은 우월한 개체를 만드는 이론뿐이 아니라, 다양한 형질을 보존함으로써 종 전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전반의 과정이다. 돟물인 인간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우리는 편리함과 안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대를 살아간다. 인공지능은 사고를 대신하고, 알고리즘은 선택을 대신하며, 플랫폼은 인간의 행동을 예측한다.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시스템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질문은 더욱 중요해진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가,아니면 만들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역사는 대중이 만들었지만 방향은 언제나 소수의 질문에서 바뀌었다. 이름 없는 다수는 문명을 세웠고, 소수의 문제 제기자는 문명의 방향을 바꾸었다.
결국 인간의 운명은 유전자와 환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유전자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환경은 그 가능성을 키우거나 억누른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본성과 환경을 모두 성찰하며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지식을 얻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오래된 질문은 그 지식이 나의 관찰과 분석에 의해 습득된 것이 아니기에 나의 브레인이 여전한 의심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캐빈 j. 미셸의 핵심으로 읽혀진다.
인간은 환경이 만드는 존재인가,아니면 자신의 본성에 맞는 환경을 구성하는 존재인가.
어쩌면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種)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유일한 겉쇠라고 한다면 반복을 멈추지 않고 있는 시지프스가 최상의 멘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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