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타임뉴스=이현석] 충북남부보훈지청(지청장 정병천)은 ‘1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곽재기 선생을 선정했다.

곽재기 선생은 1893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한 뒤 귀향하여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의 교사로 봉직하면서 민족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가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때 선생이 밝힌 망명 동기는 첫째, 조선 내지에 되도록 폭탄을 다수 수입하고, 둘째는 해외의 조선 독립운동의 상황을 시찰하고자 함이었다.

선생이 폭탄을 수입하고자 한 이유는 “조선 독립운동을 입과 붓으로 구할 대로 구하고 원할 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음으로 무기를 사용하여 피로써 구하고자 하였는데, 우리는 군함도 없고 대포도 없으므로 폭탄과 육혈포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선생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즉,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족독립을 선언하기도 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독립을 청원하기도 하고, 또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독립을 갈구하기도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기를 사용한 의열투쟁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만주 길림으로 망명한 선생은 이곳에서 김원봉을 비롯한 선생과 동지들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일제의 관리, 밀정, 관공서 등을 주살, 파괴함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려는 강력한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의열단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식민통치 및 수탈기관을 폭파 대상으로 삼았고 이것이 의열단의 제1차 대규모 암살, 파괴 활동이었다. 선생은 상해에서 중국인에게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재료와 약품을 구매할 수 있었는데, 발각의 염려로 책 궤 속에 같이 넣거나 혹은 수수 가마니 속에 넣어 활동하던 국내의 동지에게 전달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선생이 국내에 전달한 것은 폭탄 13개를 만들 수 있는 재료와 약품 그리고 권총과 탄환 등이었다. 선생은 이를 사용하여 국내에서 대규모 암살, 파괴투쟁을 전개하려 했지만, 경성으로 온 뒤 투쟁 계획을 세우다 일경에게 체포되게 된다. 의열단의 제1차 대규모 암살, 파괴 투쟁 계획은 실패하고만 것이다.

당시의 재판에서 선생은 시종일관 흰 두루마기에 금테안경을 쓰고 항상 벙글벙글 웃으며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에 대한 선생의 굳은 의지와 혁명가다운 배포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선생은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동지인 이성우와 함께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 8년을 받아 옥고를 치루고, 출옥 직후인 1930년 다시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 상해,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그러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여 같은 해 11월 귀국한다.

귀국 후 선생은 정치운동에서 벗어나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하며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 1월 10일 별세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8-01-09 15:11:17
충북남부보훈지청, 1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 ‘곽재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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