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의 아름다움에 미쳐 살았던 혜곡 최순우 선생 산문집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김수종 | 기사입력 2017-11-28 13:44:17

[영주타임뉴스=김수종]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은 금강안(金剛眼,금강역사와 같은 눈)과 혹리수(酷吏手,혹독한 세무 관리의 손끝)를 말하면서 서화를 감상하는 데는 금강역사 같은 눈(金剛眼)과 혹독한 세무 관리의 손끝(酷吏手)과 같아야 그 진가를 다 가려 낼 수가 있다고 했다.

이를 최순우 선생은 서화를 보는 눈에는 터럭만큼의 착오도, 한 점의 용서도 있을 수 없다고 표현했다. “다시 말해 서화를 가려 보는 안목이란 더할 나위 없이 올발라야 하고, 참다움을 분명하게 꿰뚫어볼 수 있는 눈과 마치 가혹한 구실아치의 손길처럼 한 치의 허점도 용서할 수 없는 준엄한 가치 판단의 자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학고재)는 한국미의 본성을 그 누구보다 속 시원히 밝혀 '동양의 안목'으로 불리던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 19161984) 선생의 글을 모아 엮은 산문집이다.

"'잘생겼다' '의젓하다' 하는 즐거움을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네 조선 자기는 코앞에 다가서서 들여다보기보다는 예사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볼 때 나타나는 정말 필요한 아름다움이 좋은 것이다. 재주가 모자란 것도 아니요 시간에 쫓긴 것도 아니면서 참 아름다움을 우리는 그렇게 길러 온 것이다."

최순우 선생은 살아생전에 여러 지면을 통해 우리 것이 지닌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구수하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밝혀 사람들의 눈을 틔워주고, 40년 가까이 박물관에 몸담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박물관으로 이끈 큰사람이었다.

하지만 선생이 생전에 출간했던 책들은 몇몇 도록을 제외하곤 선생의 체취를 찾아보기엔 그 흔적이 너무 흐릿해 선생의 글을 아끼는 독자들의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선생의 유고 선집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있어 선생의 주옥같은 글을 일부나마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반 독자들에게 최순우라는 이름은 낯설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을 갖게 된다.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은 한마디로 "한국미에 미쳐 살았던" 최순우 선생의 인간미가 흠뻑 묻어나는 산문집으로서 선생의 생생한 육성을 느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제공하리라 생각된다.

"모진 겨울바람이 불어 닥쳐오면 이 고운 용담꽃들은 그만 기진해서 눈 쌓인 산기슭에 갈색의 촉루를 남기고 죽어 가지만, 져 버린 삶이 아니라 불태워 버린 삶처럼 이 꽃의 마른 꽃가지마저 나는 좋아한다. 용담이나 억새 같은 마른 꽃가지를 길게 꺾어다가 백자 항아리에 꽂아 놓고 한 겨우내 바라보면 싱싱하게 살아 있는 꽃가지보다 더 속삭임이 절실해서 마음이 늘 차분하게 가라앉는 까닭을 알 듯도 싶어진다."

우리 것을 좋아한다고 하면 흔히 '호고(好古)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기 쉽다. 갓 스무 살이 될 무렵부터 박물관 청사를 옮기는 작업을 진두지휘하다 와병으로 작고하실 때까지 40년 가까이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가려내고 그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해 분투했던 최순우 선생에게도 그런 비아냥이 따라붙곤 했나 보다.

하지만 책을 보면 선생은 우리 것만이 최고라고 여기거나, 단순히 옛 것에 집착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무엇보다 추한 것을 역겨워하고 아름다운 것에 마음을 흠뻑 빼앗겼던 분이다.

즉 나름의 안목과 잣대를 통해 옛 것 중에서도 오늘의 눈으로 봐도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던 사람이며, 동서를 망라해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에도 아낌없이 정을 준 모던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 해 봄가을이 가고 또 겨울이 왔고 나는 음산한 겨울비 뿌리는 파리에서 마로니에 낙엽을 밟으며 서울의 벽오동관 생각을 잊은 날이 없었다. 할 이야기도 쌓이고 보일 것도 많아서 혼자 거리를 걸으면서도 그분과의 마음 속 대화로 외로운 줄을 모를 때가 있었다

내가 서울을 떠날 때 그분이 전송해 주었는데, 우리는 차 속에 나란히 앉아 서로 차고 있던 팔뚝시계를 바꾸어 차면서 오고 가는 마음속의 대화가 있었고 그 묵묵한 대화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또한 어떤 사명감이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산천과 우리 것을 둘러싼 뭇 생명들과 조형물들의 아름다움을 유유히 즐겼던 사람으로 보인다.

선생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마음에서 온다고 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속속들이 깨우쳐주는 글들로 이루어진 책이라면,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마음씨를 엿보게 하는 책이다.

화사한 꽃을 피우는 봄보다는 이슬 머금은 붉은 열매를 단 가을 나무의 잔가지, 텅 빈 가지가 달빛을 받아 창호지 문에 그려주는 추상화,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낙엽의 스산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기울이는 선생의 모습은 어찌 보면 고독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중년의 남자들끼리 손목시계를 바꿔 차며 석별을 정을 나눈다든지, 당나라 때 서역에 산 것으로 보이는 여인의 미라가 전쟁 통에 또다시 갈가리 부서진 데 분노하고 허탈해한다든지, 피난 가느라 남겨두고 갔던 개 바둑이와 해후하며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선생의 깊은 속정에 반하게 된다.

돌에 물을 주며 바라보고 기르는 모습, 김장 무를 잘라내 키운 무순이 피워낸 보랏빛 꽃에서 간절한 생명을 읽는 마음씨, 시든 가을 풀숲에서 피어나는 용담꽃을 못 견디게 그리워하는 모습, 스위스 목장에서 얻어온 소방울을 풍경 삼아 걸어두고 그 소리를 즐기는 모습에서 섬세한 감성을 읽게 된다.

선생은 우리 것은 "첫눈에 눈을 사로잡는 화려함이나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봐야 하는 근시안적인 신경질이 없으며, 거칠고 성글어 보여도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시원하고 대범하면서 담담하고 조촐하다"고 말한다.

선생이 고른 옛 그림과 도자기의 해설을 보면 무엇보다 그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선생 자신이 참으로 소박하고 조촐한 것을 추구한 '선비'였음을 느끼게 된다. 선생이 골라잡은 조선시대 미남미녀에 관한 짤막한 글들을 읽을 때면, 익살스럽고도 구수한 표현에서 여유롭고 따뜻한 시선을 느끼게도 된다.

"한국적이란 말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양식에서 우러난 무리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소박한 아름다움, 호젓한 아름다움, 그리움이 깃들인 아름다움, 수다스럽지 않은 아름다움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 속을 고요히 누비고 지나가는 익살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아울러서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은 "함께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때로 아픔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로움이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 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그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한다"라고 말한다.

"가벼운 여름 단장을 한 한 앳된 여인이 마치 사진이나 찍으려는 듯이 포즈를 취하고 서 있는 모습, 나긋나긋한 두 손으로는 가볍게 앞가슴에 달린 삼작노리개를 매만지고, 무거울 듯 머리 위에 큰 트레머리가 멋들어지게 얹혀 있으나 반듯한 맑은 이마 위에 선명한 가르마를 반쯤만 가린 풍경이 오히려 날아갈 듯만 싶게 경쾌하다."

그의 평생의 한국미 사랑은 우리 모두와 함께 나누는 아름다움이기를 호소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같이 앓고, 같이 나누기 위해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은 만들어졌다.

한편 선생이 말년이 거주하던 성북동의 가옥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268호로 최순우 옛집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개발 사업으로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는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시민들의 기부금과 증여를 통해 보존대상지를 매입하거나 확보해 보존하는 활동을 하는 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The National Trust of Korea) 문화유산기금이 지난 2002년 인수하여 유지관리하고 있다.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저자인 혜곡 선생은 1916427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순우는 필명이고 본명은 희순(熙淳)이다. 1935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미술사학자 고유섭에게 감화를 받아 한국미술사 연구에 뜻을 세웠다.

'조선고적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개성의 여러 유적지를 답사했고, 특히 고려청자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고보 졸업 후 잠시 교편을 잡다가 1943년 개성부립박물관에 들어가 한국 미술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기 시작했다.

1945년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연구관·미술과장·학예연구실장 등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하였다. 작고하던 해인 1984년까지 40년 가까이 박물관에 봉직하며 당시 일반인에게 멀게만 느껴졌던 박물관을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애정을 기울였다.

1950년부터 서울대·고려대·홍익대·이화여대 등에서 미술사를 강의했으며, 1960년 여름 '고고미술동인회(한국미술사학회 전신)'를 발족하여 전국의 유적지를 누비고 <고고미술>을 발간하여 한국 미술사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한국평론인회의 대표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1945년부터 5년간 문학지 <순수>의 주간을 맡았으며, 우리 문화재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밝힌 주옥같은 글을 열정적으로 발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의 참 아름다움과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평생 문화재와 한국 전통미술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온 그는 심미안의 소유자로 일찍이 우리나라 고미술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알아보았다. 한국의 도자기, 전통 목공예, 회화사 부분에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이러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여 회화, 도자, 조각, 건축 등 한국 미술의 전 영역에 걸친 작품 120여점에 대한 글들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달항아리를 '너무나 욕심이 없고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 하다', '그 어리숭하게 둥근 맛을 어느 나라의 항아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대견함을 느낀다', '잘생긴 며느리 같다'고 표현하는 등 예술과 전통을 대중들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황수영, 진홍섭과 더불어 개성의 3걸로 불린 그는 박물관에서 일한 경험에 근거하되 강한 직관을 바탕으로 한국의 미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미에 대해 "우리 강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며, 거기에는 우리민족의 성정이나 생활이 녹아 있어 그들이 표현한 미술품에 나타난 아름다움도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익살, 은근, 고요, 순리, 백색, 담조(淡調), 추상 등 독자적인 미의 특질을 지녀 세계적인 미술품으로 당당히 자리 잡은 것"이라는 정의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미술사 개설> <한국 공예사> <한국미 한국의 마음> 등이 있으며, 유고집으로 <최순우 전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청사를 구() 중앙청 건물로 이전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중 1984121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딸 수정 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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